바람, 이라는 듣기 좋은 말 - 첫 번째 이야기
그날은 12월의 마지막 날이었어요. 며칠 전 아내에게 당근에 물건을 올려 달라고 부탁했었거든요. 뭘 올려 달랬더라… 아이패드였던가… 하여튼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요. 올린 물건에 댓글이 달려서 아내의 폰을 보았어요. 때마침 톡이 하나 떴죠. 낯선 남자의 이름이었어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래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당황한 아내가 폰을 빼앗아 갔어요. 그리고 앞치마를 두른 채 뭔가를 지우더군요. 제가 수정하려던 당근 글을 지웠다고 했어요. 하지만 이후에 알았죠. 당근 글이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전에 없던 직감, 본능, 육감이 밀려왔어요.
새해를 맞는 첫날 새벽,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아내의 폰을 열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아까 알림으로 떴던 톡 내용은 사라진 후였어요. 그 대신 새해 인사가 떠 있었죠. 그 이름이 바로 전날 보았던 이름이었어요.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자 동생에게 소개해 줬다던 그 남자 동생이요. 그런데 반말로 새해 인사를 보냈더라고요. 그리고 아내는 연신 ‘ㅎㅎ’를 남발하며 인사를 받아줬지요. 20년을 살아온 저는 정작 나누지 못했던 인사였어요.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어요. 친한 동생이니, 반말도 할 수 있겠다 했죠.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은 마음을 지울 수 없었어요. 남자에게도 육감이라는 게 있는 걸까요? 잠이 오질 않았어요. 의심이 밀려왔거든요. 남자 동생이라면 왜 황급히 카톡 내용을 지웠을까, 남자 동생인데 왜 새해 벽두부터 인사를 할까, 그 인사는 왜 반말일까, 그 인사를 받는 아내는 왜 그렇게 행복해 보일까. 한 번 커지기 시작한 의심은 멈출 수가 없었어요.
때마침 아내에게 선물했던, 그렇게 갖고 싶다고 하고선 딱 하루 차고 나갔던 스마트워치 생각이 났어요. 스마트워치에 카카오톡을 깔고 떨리는 마음으로 연동을 했어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은 말렸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리고 스마트워치로 주소록 검색을 했습니다. 같은 이름은 금방 찾을 수 있었어요. J… 이니셜로 불러보죠.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치 심장을 찔리는 것 같거든요. 문자를 보냈습니다. 우리 아내를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요. 그랬더니 답 문자가 왔어요. “안녕하세요.“라고 반듯하게 답이 왔어요. 함께 일하던 동생이라고. 다행이다 싶었어요. 다행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새해의 첫날이 지나갔어요. 하지만 뭔가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듯 불안했어요. 한동안 톡은 오지 않았어요. 아마 왔어도 아내가 지웠을 겁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그런데 문제의 그날이 왔어요. 아내는 주말마다 집에서 가까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요. 그렇다고 제 벌이가 시원찮은 건 아닙니다. 월에 천만 원 이상은 버니까요. 아이들 학원도 문제없고, 고깃집 회식도 크게 부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자꾸만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살림보다는 돈 버는 게 좋다고요. 무슨 용돈이 그렇게 필요한 걸까? 그러면서도 저는 아내가 일하는 걸 말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어울리는 곳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침 장인어른이 쓰러지신 것도 한몫했습니다. 물론 그전부터 아내는 꾸준히 바깥에서 일을 했지만, 이번에는 파킨슨병에 고관절 골절까지 입은 장인어른 병원비에 보태려나 보다 했어요. 그런데 지금 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말에 나와 함께 있는 게 싫었을까요? 아니면 그놈에게 용돈이라도 주려고? 그런데 12시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아내의 폰에 톡이 왔습니다. 다름 아닌 J로부터요.
“어젯밤 섹*하는 꿈꿨어. 존* 하고 싶다.”
놀랍게도 아내의 메시지였어요. 그리고 곧장 답이 왔죠. “하고 싶으면 해야지. ㅎㅎㅎ” 온몸이 파르르 떨려왔어요. 뭔가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감에 귀는 멍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다음부터는 다음 글이 기대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 올라올까? 띄엄띄엄 올라오는 카톡 메시지를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렸습니다. 아내는 그 전날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봤대요. 그리고 그 영화의 주인공 원빈보다 J가 더 잘생겼다고 톡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J의 대답이 가관이었어요. “심각하네. ㅎㅎㅎ” 아내는 바쁜 듯했습니다. 카톡이 오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습니다. 그리고 마침 제가 올린 모니터를 사러 온 사람이 아내가 일하는 편의점 근처에 왔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저는 당근에서 거래를 할 때면 그곳 앞으로 오라고 얘기하곤 하거든요. 집 주소를 알려주긴 부담되니 가장 가까운 편의점 주소를 알려준 거죠.
그런데 제가 거래를 하러 나간 그 때 와이프도 냉장고를 정리하러 나왔는지 밖으로 나왔더군요. 아무 일 없는 듯이. 얼마 벌었냐고, 내 몫은 없냐고, 와이프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습니다. 예상했던 그림이 아니라 당황했어요. 그 길로 와이프를 데리고 편의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J가 누구야?" 와이프 눈이 흔들렸어요. 같이 일하던 동생이라고, 아는 여동생에게 소개시켜 준 남자라고,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하더군요. 지금 하는 카톡을 보았다고 얘기했습니다 많이 당황했습니다. 아주 덤덤하게. 잘 당황하지 않는 친구인데... 눈은 저를 바로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보고 있었어? 많이 놀랐겠네." 마치 남의 집 얘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담담해. 뺨이라도 때리지..." 이건 좀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더는 할 말이 없더라구요. 머뭇거리다가 바보처럼 편의점을 걸어 나왔습니다.
겨울인데도 햇볕이 따뜻한 날이었어요. 그냥 멍한 눈빛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잠시 후에 와이프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집으로 오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차 안에서 와이프를 만났습니다. 와이프는 카톡으로 '술친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제가 그 놈이랑 살거냐고 물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술친구는 아니잖아." "그냥 정서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같이 살 것도 아니고..." "...미안한 말이지만... 섹파잖아. 섹파..." 이렇게 말하는 제 목이 메여왔습니다. 와이프가 아주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거지 뭐..." 그 길로 나는 차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와이프는 울지도, 빌지도 않았습니다. 평소처럼 냉정하고 담담했습니다. 다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작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터벅 터벅 집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와이프는 한 동안 집으로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스마트 워치로 확인해보니 J가 보이스톡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영리한 녀섞이에요. 스마트 워치로는 텍스트와 이미지만 볼 수 있거든요. 와이프가 다시 보이스톡으로 화답을 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두 사람 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말을 주고받았을까요? 그래서 제가 와이프에게 톡을 보냈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전화를 하라고. 그리고 와이프는 J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말의 밤이 왔습니다. 얘기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와이프에게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애매했어요. 현재 시간 8 시 20분. 시간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9시 반이면 가게들이 문을 닫으니까요. 그래서 모텔로 가자고 했습니다.
가는 길에 소 주 3병과 맥주 4병을 샀습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 근처의 모텔인데 시설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고보니 1년 전쯤 와이프와 불현듯 모텔 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따라 우린 전에 없이 낮술을 함께 했어요. 매우 유쾌한 오후였어요. 맛있게 실비집 고기를 먹고 스타벅스 로 가자고 하니 와이프가 제 손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모텔로 갔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볼이 발그래진 아내의 손을 잡고 나른 한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걸어나왔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때 저는 행복해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술에 취해 모텔에 가는게 너무 자연스러운거 아닌가 하구요...
술을 마셨습니다. 제가 술이 센 편인데 고작 1병 반을 마시자 알싸한 기분이 올라왔습니다.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습니다. 와이프는 덤덤하 게 말했습니다. J가 자기를 이상형이라고 말했다고, 새우 껍질을 까주었다고, 지나가는 말로 무슨 말을 하면 꼭 들어주곤 했다고. 그런데 집 에서는 밥 하는 역할, 빨래 하는 역할로밖에 보지 않는다고. 그래서 마음이 끌렸다고 말했습니다. 갑자가 12월 31일,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구찌백 할인 사이트를 보여주며 선물을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와이프는 무척 신나했어요. 빨간 백 하나와 지갑 하나를 딸과 함께 흥분하며 정성스럽게 골랐거든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백 때문이 아니라 J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즈음 미팅을 마치고 지나 가다 와이프가 좋아하는 낚지집이 보여 사들고 간 적도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선물로 현금 100만 원을 주었어요. 그런데 와이프는 J 의 마음 씀이 그렇게 좋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단순했어요. 우리에겐 아이들이 있거든요. 그곳도 제법 예민한 고3, 중3이에요. 아이들은 와이프를 무척이나 따르는 편입니다. 와이프도 아이들을 금쪽같이 챙기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혼은 선택지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평생 용서하지 못할거라 했습니다. 헤어질 수 없지만, 같이 살아도 지옥같을 거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 말을 하면서도 와이프가 그리웠습니다. 침대 위로 불렀습니다. 키스를 했습니다. 손으로 아내 몸을 더듬자 생리 중이라 했습니다. 분명 오늘 오후만 해도 '존* 하고 싶네' 하던 아내의 톡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섹*를 하고 싶은게 아니었습니다. 아내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지요. 하지만 끝내 아내는 냉정했습니다. 조금의 유예 기간을 가 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유예 기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유예 기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미팅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대신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상간남을 고소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간통죄가 사라져 형사가 아닌 민사만 가능하다는 것을 검색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나였습니다. 합의를 하면 조금 더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봐야 2500만원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 놈이 택배 일을 하는, 돈이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돈으로 타격이 될까요? 하지만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변호사를 보내고 일을 하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하루 종일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소주 2병을 샀습니다. 집에 와서 MSG 워너비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평소 같지 않게 스피커를 연결해 볼륨을 높이고 따라 불렀습니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을 들어도 음악을 끄지 못했습니다. 노래가 끝난 후의 조용한 침묵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와이프는 밖에서 이삿짐을 사고 있었습니다. 한 달 후면 새 집으로 이사 가기로 했었거든요. 밤에는 잠이 오지 않고, 낮에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그 친구의 전화도 받지 않고 만날 일도 없을 겁니다. 그래도 톡이라도 해야 미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영화 '해피 엔드'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첫 장면부터 정사씬 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길게, 적나라하게 베드신을 연기할 줄 몰랐습니다. 나는 그 장면이 영화 같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에 서 와이프의 얼굴과 신음소리와 그놈의 몸과 엉덩이를 쥔 손을 보았습니다. 미칠 것 같았지만 영화를 끌 수 없었습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영화 후반, 주인공이 아내를 거침없이 찌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심정으로 찌르고 또 찔렀습니다. 아무런 양 심의 가책 없이요. 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괴로움과 고통과 공허함과 허탈함은 그대로였습니다. 그건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소주를 마셔도 맹물 같고, 뒤늦게 찾아온 허기에 급히 끓여온 불닭볶음면은 하나도 맵지 않았습니다. 돌아누워도 앉아도 숨이 막힙니다. 그리고 생각은 언제가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톡과 상상 속의 정사씬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습니다. 와이프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된 지 하루가 지났습니다. 이 지옥 같은 날의 첫 날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사실이 무섭습니다. 이런 날 도 언젠가는 웃으며 되돌아보는 그 날이 올까요? 그럴 거라 생각은 하면서도 아닐 거란 생각도 듭니다. 죽어도 끝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혼자 이렇게 바람처럼 말해봅니다. 내 몸의 생기 하나가 영화 속 근조등처럼 둥실 하고 떠오르는게 느껴집니다...
...아내가 바람을 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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