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머니요

바람, 이라는 듣기 좋은 말 - 일곱 번째 이야기

M
탑매니저
2025.03.14 추천 0 댓글 0

1.

 

회복이란 무엇일까요? 아무 일 없는 듯 과거처럼 살아가는 걸까요? 그건 불가능하죠. 깨진 그릇, 엎질러진 물처럼 말이죠. 결코 아물지 않을 상처를 입은 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고행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런데 그거, 너무 잔인한 삶 아닌가요? 제주도 여행 첫날, 정말 맛있는 식당에서 모두 만족한 식사를 하고 여미지 식물원에서 힐링도 하고 실탄 사격장에서 총도 쏴보았습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분명 모두 행복했어요. 아이들도 우리 분위기를 아는지 전 같으면 데면데면 무심했을 텐데 함께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돌아오는 차에서 제가 무심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은 엄마 얼굴을 표적지로 하고 쏴볼 거야!" 사실 심각한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일순간 와이프도, 아이들도 싸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무의식이 이렇게 무서운 거군요. 온 가족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견디고 있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사실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따라 여행을 온 것도 무언의 응원을 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3인 아들이 가족 활동에 그렇게 적극적인 건 처음 보았거든요. 

 

2.

 

제가 코를 심하게 골아서 방을 두 개 잡았습니다. 밤에는 와이프를 따로 불러 '이야기'를 했습니다. 따로 상담사를 소개해 주었는데 무려 4시간을 상담하고 밥까지 얻어먹고 왔더군요. 그냥 나만큼은 아니어도 힘들겠다 싶어서 소개해 준 분인데 그만큼 힘들었는지, 좋은 상담사를 만난 것인지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핵심은 자기 자신이 지금 '멍한' 상태라는 겁니다. 생각보다 몸이 앞서는 스타일이래요. 그래서 우리 가족들 가운데서는 사실상의 리더였죠. 모든 대소사, 감정적인 케어까지 와이프가 챙겼으니까요. 그런데 비로소 이번 상담을 통해 '욕구'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남편, 아이들,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퍼주기만 했다고 합니다. 제가 홀라당 와이프에게 세뇌되어 이런 얘기 하는 거 아닙니다.

 

3.

 

제가 남들보다 예민하고 의심도 많습니다. 하지만 와이프의 결핍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더라구요. 그놈이 짜글이 찌개를 끓여주었다고 하더군요. 손 하나 까딱 말고 좋아하는 유튜브만 보면서 기다리라고 했대요. 그놈 집에서 그 짓을 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생전 그렇게 대접받아 본 건 처음이었대요. 남편으로서 복잡한 마음이 앞서더군요. 20년간 살아온 나보다 고 몇 달(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간 상간 놈의 배려가 마음은 물론 몸까지 열게 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모르는 척 열심히 와이프의 고백을 들어주었습니다. 사실 이혼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막 고1이 되는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혼하려고 했었대요. 더 이상의 아무런 기대 없는 이 결혼생활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답니다.

 

4.

 

그렇게 다양한 알바를 하려고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무엇을 해도 혼자 먹고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하네요. 은근 자책이 들 때쯤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다 알겠는데, 그래도 너가 나쁜 년이라고 했습니다. 외롭다고, 힘들다고, 결핍이 있다고 남편이 아닌 남자 품에 그렇게 쉽게 뛰어드는 건 미친 *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도 솔직히 말했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니가 그놈과 엉킨 장면이 떠오른다. 그것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럴 때면 숨이 멎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고 얘기해주었습니다. 어릴 때 가정 폭력을 심하게 당한 와이프도 어느 정도는 그 놀란 가슴을 이해할 것 같다고 얘기하더라고요. 하지만 그 강도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겁니다. 낯선 남자가 화장실에서 볼일보는 장면만 봐도, 공항에서 어깨 넓은 군인 하나가 내 앞에 앉아도 그렇게 '낯선' 남자와 섹스를 하는 장면이 연상되더라고요. 이거 참 미칠 노릇인데,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나만의 고통인데, 앞으로 평생 지고 갈 짐이라는 걸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더라고요.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사랑합니다. 나도 이해가 안 가지만 정말로 그렇습니다. 아내가 웃는 게 좋습니다. 맛있는 거 먹고 행복해하는 게 좋습니다. 아이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부릅니다. 매일 한 번씩 아내를 안아주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아내의 체취가, 냄새를 너무 좋아합니다. 지금처럼 조곤조곤 함께 얘기를 해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20년을 함께 살아온 사람인데 낯설기도 하고 새롭기도 합니다. 전에 몰랐던 와이프의 일상, 속마음에 대해 조금은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게 바로 '회복' 비슷한 것일까요?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의 끝에 아내도, 나도 행복한 결정을 내리게 되길 바랍니다.

 

6.

 

아내는 가족들과 웃고 떠들고 여행하는 것도 행복하지만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더군요. 식구들 빨래를 하러 빨래방에 가 있는 동안 협재 해수욕장을 혼자 거닐며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행복한 결혼이란 홀로 설 수 있는 두 사람이 함께할 때 행복한 것 같아요. 누가 누구를 의지하고 의존하기 시작하면 삐걱거림이, 비극이 시작되지요. 나와 아내는 정말 다른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다르게 해석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무려 20년을 함께 해도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 어렵더군요. 와이프를 오래도록 안아주었습니다. 등도 팔도 그리고 엉덩이도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이번 사건이 제게 준 교훈은 딱 하나입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이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만큼 아프더라고요. 가끔은 이를 악물고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요.

 

7.

 

오늘은 리조트 안에 있는 와인바에서 한잔해야겠습니다. 열 살 어린 키, 크고 잘생긴 남자와 바람을 피운 나쁜, 미친 *이 와이프입니다. 그 사실은 죽도록 절대 변하지 않을 테지요.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란 걸 절감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정했습니다. 평생 그 아픔이 따라다닐지라도. 그리고 내 선택에 책임을 지겠습니다. 같이 있지만 더 이상의 의지도, 의존도 하지 않겠습니다. 당당히 나 홀로 서겠습니다. 그 옆에 있어 주면 고맙겠지만 설사 떠난다 해도 괜찮을 만큼 나 자신을 단련하겠습니다. 어차피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한 거니까요. ‘함께’가 아닌 '각자'가 행복의 조건이라면 그렇게 해야지요. 하지만 함께였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오늘의유머

아재 입맛을 바꾸려는 비비빅의 노력

N
M
탑매니저
추천 0
3시간전
아재 입맛을 바꾸려는 비비빅의 노력

우리 사이는 어떤 사이일가?

N
M
탑매니저
추천 0
3시간전
우리 사이는 어떤 사이일가?

두렵고 짜증나는 소식 전합니다.....(정치얘기 아님)

N
M
탑매니저
추천 0
3시간전
두렵고 짜증나는 소식 전합니다.....(정치얘기 아님)

다 탄핵 기각되고 윤석열이라도 탄핵되면

N
M
탑매니저
추천 0
3시간전

혈당 조지는 음식들

N
M
탑매니저
추천 0
3시간전
혈당 조지는 음식들

[펌] 처음 당뇨 진단을 받은 당신이 해야 할 일

N
M
탑매니저
추천 0
3시간전
[펌] 처음 당뇨 진단을 받은 당신이 해야 할 일

'청소노동자 고소' 연대생 완패..판사 "소송비 다 내라"

N
M
탑매니저
추천 0
3시간전
'청소노동자 고소' 연대생 완패..판사 "소송비 다 내라"

'국민체조 시작' 목소리 주인공 별세 하셨대요

N
M
탑매니저
추천 0
3시간전
'국민체조 시작' 목소리 주인공 별세 하셨대요

바람, 이라는 듣기 좋은 말 - 일곱 번째 이야기

N
M
탑매니저
추천 0
3시간전

돈줄을 끊는 극우 추적단....

N
M
탑매니저
추천 0
3시간전
돈줄을 끊는 극우 추적단....

어디서 못된걸 배워왔는지…

N
M
탑매니저
추천 0
2025.03.13
어디서 못된걸 배워왔는지…

실용성도 없고 필요도 없는 독수리 모양 조명

N
M
탑매니저
추천 0
2025.03.13

헌재 전략은

N
M
탑매니저
추천 0
2025.03.13

브레이크 고장에도 침착 대응…버스 기사, 흙더미 활용해 참사 막아

N
M
탑매니저
추천 0
2025.03.13
브레이크 고장에도 침착 대응…버스 기사, 흙더미 활용해 참사 막아

자꾸 기각기각 이야기가 나오는데

N
M
탑매니저
추천 0
2025.03.13
1 2 3 4 5